
Anthropic의 디자인 리드이자 전 Figma 디자인 디렉터인 제니 웬(Jenny Wen)은 우리가 학교와 업계에서 배워온 '완벽한 디자인 프로세스'가 오늘날의 현실, 특히 AI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녀는 AI로 빨라진 프로토타이핑, 작아진 팀 규모, 그리고 '크래프트(Craft)'의 중요성이 커진 환경에서, 경직된 단계를 따르기보다 해결책부터 시작하고, 직관을 기르며, 규칙을 깨는 것이 훌륭한 결과물을 만든다고 강조합니다. 이 강연은 프로세스 산출물에 대한 맹신을 멈추고 디자이너 자신의 판단력과 직관을 다시 신뢰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강연은 우리 모두가 익숙한, 하지만 다소 비현실적인 '이상적인 분기 초반'의 풍경을 묘사하며 시작됩니다. 보통 디자이너들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일하라고 배웁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회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엄청난 수익을 내며, 모두가 사랑하는 제품을 만들게 되겠죠? ...정말 그럴까요? 😅
"자, 여기서 DJ가 음악을 뚝 끊는 스크래치 소리가 들려야겠네요. <br> 방금 들은 이야기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죠? 하지만 동시에 이 프로세스는 지난 몇 년간 모든 사람이 설교해 왔고, 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심지어 누군가는 이걸로 MBA 학위까지 받았을 겁니다. <br> 하지만 우리는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제니는 현재(2026년 시점) 우리가 마주한 환경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음을 지적하며, 기존 프로세스가 낡은 것이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AI(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도구들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프로덕트 매니저(PM)도 리서치나 페르소나 없이 AI를 이용해 작동하는 프로토타입을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 역시 코딩을 하고 직접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프로덕트 매니저가 여러분이 완벽한 문제 정의서를 쓰거나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것보다 더 빨리 작동하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br> 반대로 디자이너들도 더 강력해졌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적인 그림만 그리지 않습니다. 쉽게 프로토타이핑하고 직접 구현까지 할 수 있죠. <br> 현실을 직시하세요. 기존 디자인 프로세스는 오늘날의 도구와 기술에 비하면 구식입니다."
최근 몇 년간 이어진 정리해고와 인원 감축으로 인해 팀은 작아졌습니다. 하지만 작은 팀이 오히려 소통 비용을 줄여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디자이너는 전략적인 기획부터 구현까지 더 넓은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그 경직된 프로세스를 따를 시간이 있을까요? <br> 솔직히 말해서, 저는 우리가 그 모든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것을 해야 하고, 교과서적인 프로세스를 따를 시간은 없습니다."
AI가 '그저 그런' 수준의 결과물은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게 해주면서(바닥을 높임), 오히려 디자이너의 고유한 취향(Taste)과 장인정신(Craft), 품질(Quality)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단순히 기능만 하는 앱이 아니라, Linear나 Notion Calendar, Not Boring Software의 앱들처럼 사용하기 즐겁고 만듦새가 뛰어난 제품에 지갑을 엽니다. 이런 제품들은 정해진 프로세스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집요한 장인정신에서 나옵니다.
"AI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만들지 선택하고 큐레이션 하는 능력'입니다. <br> 사용자는 여러분이 만든 프로세스 산출물이나 완벽한 사용자 여정 지도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느끼고 보는 최종 경험(End experience)에만 관심이 있죠."
모든 프로젝트는 이해관계자, 복잡도, 기술적 제약, 기한이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의 고정된 프로세스를 모든 프로젝트에 적용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한 맹신은 사람들이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프로세스 산출물'을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br> 포트폴리오를 보면 80%가 프로세스 과정이고, 정작 최종 화면은 딱 한 장 있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봅니다. <br> '프로세스를 믿으세요(Trust the process)'라는 말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프로세스를 믿지 마세요."
제니는 기존 프로세스를 따르지 않고, 실제로 현장에서 훌륭한 성과를 냈던 5가지의 현실적인 방법을 소개합니다.
디자인 프로세스에서는 '문제 정의' 없이 '해결책'부터 내는 것을 금기시하지만, 때로는 이것이 정답일 수 있습니다. 특히 AI처럼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을 때는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해결책)를 먼저 보고, 그걸 어디에 쓸지(문제)를 역으로 찾아야 합니다.
Anthropic의 'Claude Artifacts' 사례:
"한 연구원이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는데, Claude가 코드를 작성하면 옆에 인터랙티브한 앱이 바로 뜨는 기능이었죠. <br> 이건 '문제 정의서'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이걸 보고 발전시켰고, 팀원들은 '이거다!'라고 느꼈습니다. <br> 만약 우리가 문제 정의부터 시작했다면, 절대 이 기능에 도달하지 못했을 겁니다. 해결책을 보기 전까지는 그것이 풀 가치가 있는 문제인지조차 몰랐으니까요."
훌륭한 제품은 '더블 다이아몬드' 프로세스에는 없는, 기나긴 반복 수정(Iteration)의 시간에서 나옵니다.
Figma의 'FigJam' 사례:
"우리는 출시 후에도 단순히 새 기능만 추가한 게 아닙니다. 스냅(snapping) 느낌, 선택 영역의 테두리, 색감, 폰트 크기 조절 방식 등... <br> 수년 동안 디테일을 다듬는 데 엄청난 시간을 썼습니다. <br> 이런 작업은 디자인 프로세스 단계에는 나와있지 않아요. 그저 여러분이 신경 써야 하고,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일입니다."
'직관'은 디자이너들에게 금기어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데이터가 없잖아?", "사용자 중심이 아니잖아?"라는 비판을 받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니는 직관이야말로 전문가의 강력한 무기라고 말합니다.
"직관은 단순히 '찍는 것(Guessing)'이 아닙니다. <br> 직관은 어떤 주제에 대해 너무나 깊고 전문적으로 알고 있어서, 증거를 수집하거나 길게 생각하는 과정을 건너뛰고 빠르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능력입니다. <br> 훌륭한 직관을 갖는 것은 존경받아야 할 일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그녀는 직관을 기르기 위해 사용자 피드백(트위터, 레딧), 리서치 결과, 영업팀의 이야기, 대시보드 데이터 등을 끊임없이 흡수하여 사용자와 제품에 대한 내면의 모델(Internal Model)을 구축한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모든 작은 결정을 일일이 테스트하지 않고도 빠르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유명한 '구글 벤처스 스프린트'나 아마존의 '보도자료(Press Release) 쓰기' 같은 방법론도 그대로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팀의 상황에 맞게 변형해야 합니다.
"저는 디자인 프로세스를 이케아(IKEA) 조립 설명서처럼 생각하곤 했어요. 설명서대로만 하면 결과물이 나오죠. <br> 하지만 디자인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게 '빌리 책장'인지, 아니면 의자인지, 램프인지, 핫도그인지조차 모르고 시작하거든요. <br> 무엇을 만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똑같은 단계가 매번 통하겠어요? 설명서는 없습니다."
때로는 어떤 거창한 문제 해결이 아니라, 단순히 사용자를 미소 짓게 하기 위해 디자인할 수도 있습니다. FigJam의 스탬프, 감정 표현(Emotes), 하이파이브 기능 등이 그 예입니다.
"이 기능들에 대한 프로세스는 단순했습니다. 그냥 코드로 만들어서 팀 미팅에 가져가 써보라고 했죠. <br> 사람들은 미소 짓고 웃었고, 미팅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br> 이건 페르소나나 사용자 여정 지도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그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 했던 팀의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제니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프로세스라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의 가치는 프로세스를 반복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누구나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겠죠. <br> 우리는 지금 프로세스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선례가 없어서 무섭기도 하지만, 동시에 짜릿한 일입니다."
그녀는 우리가 이 새로운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프로세스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신뢰'라고 말하며 강연을 마칩니다.
"우리는 다시 디자이너로서의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br> 경험과 가치 있는 기술을 가진 전문가로서의 자신을 믿으세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올바른 도구를 휘드르며, 무엇이 훌륭한 디자인인지 직감적으로 아는 여러분의 능력을 믿으세요. <br>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를 믿는 대담함이 필요한 때입니다."